짧고 길게/자작시

겨울의 작전

빛의 염탐꾼 2019. 12. 31. 16:22

겨울의 작전

 

 

 

사람들은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 온 표정으로 무릎까지 덮는 까만옷을 입고 저마다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납작 엎드려 있다 한 손엔 성경을 또 한 손에는 총을 움켜쥐고 은둔형 포복 혹은 매복의 자세로 마주보는 이 하나없이 더러는 눈을 껌벅이고 더러는 졸고 있다 가끔씩 졸다 깨어나서 둘러보면 들판의 풀들도 산속의 나무들도 모두 등을 돌리거나 비껴 앉은 똑같은 자세 하늘을 나는 새들도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간혹 포복의 무리 중에 아직 피가 끓고 있는 축들이 있어 이미 전설이 된 오래된 작전을 입에 올리며 진지를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가거나 좌중을 향해 투쟁을 선동하기도 하지만 모두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금새 뒤돌아오거나 말꼬리를 내리고 만다 싸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싸울 의사도 불분명한 지금 이 곳에서 예전 기동전의 습관이 낳은 것임에 분명한 이 맹목적인 행동 또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건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는 이들조차 사실은 이미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하루일과는 단순하다 아침이면 언제나 하늘에 매달린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이한치한의 정신력으로 무장하자는 구호를 들으며 맛집 검색을 하고 모든 구호가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지는 점심때를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냉면집으로 몰려갔다가 저녁이면 부어 오른 배로 전장의 북소리를 내며 맛집 소개가 필수로 들어가는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잠든다 하긴 이미 생존은 물론 생활에 필요한 일정한 지위와 돈을 부여받은 이 진지의 구성원들에게 등 따스고 배부른 것 이외의 다른 행동들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수이고 각종 선동문의 앞을 차지한 골고루라는 표현 또한 처음부터 액세서리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중동의 화약고라는 곳에서 수륙연합작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외신들이 속보를 토해내고 뒤이어 그 중 절대다수가 아이들과 부녀자를 비롯한 무고한 민간인 이였다고 모든 일간지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했지만 그 어떤 무용담도 영웅담도 풍문으로 사라지고 마는 얼어붙은 태평성대 그대 아직도 정직한 전술과 전략을 꿈꾸고 있는가 물 오른 봄바람의 수공작전도 펄펄 끓는 염천의 화공작전도 지나간 이곳에서 모든 미소 띈 평화전술은 위선이자 위악이다 추적추적 가을비에 젖어가는 육탄전 인해전술도 성동격서 미인계도 삼십육계 줄행랑 삶과 사랑만이 오래된 구식으로 남아 그저 차갑고 낡게 식어가는 냉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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