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문제는 언제나 자기중심주의에 있고
자기중심주의적인 나의 시점은 여전히 서쪽을 향해 있다
붉은 해가 서산을 발갛게 물들이는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동구 밖에 나가서 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삼십리 고갯길을 걸어갔다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은
노을 속의 새들이 빗살무늬를 새기며
뉘엿뉘엿 무리지어 서산을 넘어가고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날 밤이면 나는 어김없이
할머니 품에 안겨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는데
할머니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나는
할머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꿈같은 유토피아는
온통 서산 너머에 있고
현실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 속의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도 모두
그 곳에 모여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서산 너머에 더 눈이 갔던 내가
일몰과 황혼과 노을빛으로 물드는 김민기와 정태춘의 노래를
좋아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외적으로 김민기의 천리길과 아침이슬에는 아침동산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왠지
일출과 함께 솟아오르는 그 동산이란 것이
온갖 급훈과 교훈과 애국가로 포장된 유년의 동화와 같아서
별로 정이 가지 않기는
팔십 년대 앨범 끝에 강제적으로 한곡씩 집어넣었던 건전가요와 매일반이다
건전가요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80년대를 장식했던 수많은 건전가요 중에서 그 지존은 단연
혜은이가 부른 시장에 가면이었다
그 시절에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었고 어쩌면
남파간첩들의 학습 일순위가 이 노래였을 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당시 시장에 가면 이 노래가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재생되었고
내가 시장에 가는 걸 싫어하게 된 건 알고 보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동산에 떠오르는 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작정하고 일출을 보러 간 적도 없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일출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살짝 고개를 돌려
어스름 땅거미를 지우며
저 너머로 기울고 스러지고 넘어가는 저녁이여
내 시선은 언제나 서산을 향해 있고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지독하게도 감상적인 이
패배주의는 어쩌면 아주 오래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