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돌이켜보면 모든 관계는 수상했고
하 수상하지 않은 시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우리들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는 김상헌의 마음으로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표어를
해마다 썼다 지우고 밤이 되면
학교에서 일러준 간첩식별법을 외우고 또 외웠다
크레용과 물감세트에서 적색이 유독 빨리 떨어져 낭패였던
그 시절이 지나가고도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아침 일찍 이슬을 맞으며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거나
자주 보지 못했던 친척이라도 찾아오면 덜컥 겁부터 났고
고등학교 자취시절 밤늦은 시간이면
옆방에 혼자 사는 아저씨가 이불을 덮고 라디오를 듣거나 뭔가를 타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귀를 쫑긋하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어쩌면
역사적 사명을 뛴 어떤 공화국의 첩보원이라도 된 듯
영문도 모르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나는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추위 때문에)
휴대폰으로 이리저리 시간을 때우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눈을 붙이는데
그러고 보니
그 시절 간첩식별법에 보는 즉시 신고하라는 나오는
생필품 등의 물가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나
일정한 직업 없이 군부대를 자주 기웃거리는 사람(나는 주로 철책이 쳐진 근처를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과 같은 인물군들은
지금의 나랑 너무나 닮아 있다
스무 세 살 청년 시절에
글을 써보겠다고 가입했던 단체는 알고 보니
운동권 문예조직 이였는데 해마다 일월이 되면
전년도 사업평가와 신년 사업계획을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과장된 눈물이 범벅된 회개기도로 시작하여
뜬구름이라도 잡을 듯한 부흥찬송으로 끝나는
어떤 사이비교회의 부흥회 같은 회의를 했지만
결과물은 늘 내용 없이 장황하게 긴 종이 문건 뿐 이였다(교회 부흥회는 헌금이라도 많이 쌓이는데)
그 당시에 우리들은 선거철과 같이 정치적인 시기가 되면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정세분석이라는 문건을 자주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 한 것은
그 글들에 나왔던 분석들이 점쟁이 빤스라도 입은 것처럼 정확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그 어떤 선거에서도 내가 속한 진영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의 그 간격에 있다
지금은
나무도 아닌 듯이 풀도 아닌 듯이
어떤 매화는 벌써 피었다 지고
모과나무 우듬지에 새움이 트는
겨울도 아닌 듯이 봄도 아닌 듯이
겨우 이월의 중순
비도 아닌 것이 눈도 아닌 것이
차들은 자주 연쇄추돌을 일으키고
이름마저 얄궂은 역병이 돌고 돌아
흉흉한 소문만이 무성한
간간첩첩(間間疊疊)의 시절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어대는 형벌이 내려진다 해도 절대로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을 거둘 수 없는 나는
올 동 말 동 비밀로 가득 찬 세월의 사이에서
도대체 어떤
첩보를 염탐하고 캐내어 또 어디론가
타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