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파경

빛의 염탐꾼 2020. 2. 13. 14:58

파경

 

 

 

거울을 깨부수고 싶을 때가 있다

발가벗겨져 거울 앞에 선 유다가 되어

면벽수도하는 동굴암자의 고승이 되어

자꾸만 질문을 던져보지만


나도 나를 모르는

안개 속의 몽유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어

앞에 버티고 선 거울을 박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은 문체의 종류에 대해 알아볼까요 문체의 종류에는 우유체 강건체 간결체 만연체 건조체 화려체 등이 있는데요 이번에 국어사전에 새롭게 등록된 도대체?라고 들어 보셨나요 다른 말로 거울체 또는 안개체라고도 하고요 어떤 형태나 명제에 대해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거울같은 곳에 비쳐보고 소리도 질러보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문체인데요 계몽시기의 강건체와 모더니즘적인 우유체를 거쳐 이십일세기 현대를 대표하는 주요 문체가 되었답니다 이 문체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형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이 문체의 문장 속에는 나는 누구인가 너는 무엇인가 설마 아니야 같은 온통 안개 속에 휩싸인 듯한 언어들로 넘쳐나지요


어제는 이발을 하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도대체 누군가 싶어 어색한 표정을 지었더니 미용사가 내 뒤에 또 하나의 거울을 갖다 대었어요


뒤통수와 뒤태를 보고 싶을 때 두 개의 거울이 필요하듯 타인들과 대화할 때 나는 자주 이중부정문을 사용하는 편인데 그 때마다 강한 긍정의 자신감은커녕 감추고 있는 뭔가가 들키는 게 아닌가 싶어 나도 몰래 괜히 마음이 찔렸어요


우리 집 강아지는 거울 앞에 서면 자꾸만 짖어대요 좋아서인지 싫어서인지는 도대체 모르겠고 어쨌든 걔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긴 있나 봐요 그래서 부르기 쉽게 거울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가끔씩 그 놈에게 묻지요


거울아 거울아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인가


들려오는 대답은 온통

파경 또는 파계의 순간처럼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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