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식품
선거만큼 호불호가 확실히 나눠지는 국가제도도 드물다 예를 들어
피어나는 순서와 관계없이 좋아하는 봄꽃을 적어 보세요라는 주관식 문항에 대한 답으로
목련이나 살구꽃 또는 복사꽃 벚꽃 중 그 어떤 꽃이 와도 큰 논란거리가 되지 않고
올라오는 순서와 관계없이 좋아하는 봄나물을 선택해보라는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문항의 답으로
1번 냉이 2번 달래 3번 쑥 4번 두릅 중에서
연필 굴리기를 하듯 그 중의 하나를 뽑아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테지만
기호 1번 기호 2번 기호 3번 기호 4번..... 식으로 나열해 놓고
자신의 이념이나 정치관에 맞는 좋아하는 정당을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선거의 경우에는 말이 좀 달라지는 게 사실이다
대선이다 총선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선거제도에서
기호를 부여하는 순서가 대통령집권당의 유무에서 오는지 국회의원 의석수에서 오는지 나는 모르지만
컴퓨터파일 정렬방식에는 시간 이름 크기순서 등이 있고
각각의 항에서도 오름차순 내림차순이 있고 또 그 역순이 있다는 것은 나는 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장유유서니 오뉴월 하루 땡볕 빨래 타령 서열타령 뒤에 반드시 되돌아오는 구절은
오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가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놈들의 도발
내가 보기에 오히려 막돼먹은 쪽은
뭔가 뒤가 켕기는 게 있는지 순서와 정렬을 목청껏 외치는 쪽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는 그렇다 치고 조율이시는 또 뭔가요?
대추 다음에 밤이 오고 밤 다음에는 또 무엇이? 새벽도 아침도 차례차례?
도대체 내 차례는 어느 세월에 오나요?
국민의례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먼저인가요? 애국가 제창이 먼저인가요?
결혼예식에서 신랑신부 맞절이 먼저인가요? 주례선생님말씀이 먼저인가요?
모든 차례와 순서를 까먹어서 문제를 풀 수 없다고요? 그래요
매화 산수유 뒤에 생강나무 그 뒤로 진달래 개나리 목련 앞 다투어 피어나고 다시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어나는 결정적으로 왕 벚이 지고 산 벚이 피어나는 봄날이지만
모든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던 그 어느 해 봄날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꽃피는 순서를 잘도 기억하던 우리 노모도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토끼처럼
모든 게 뒤죽박죽 다들 아시잖아요 치매는 초기에 잡아야 한다는 거
내 친구 기호는 식품회사를 차렸는지 정당 활동을 하는지 몇 년째 연락이 없고
선거도 투표도 알고 보면 기호식품(믹스커피는 동서식품을 제일로 쳐준다지요)을 고르는 행위랑 하등 다를 바 없어
다들 자기 기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하겠지만
능력이다 뭐다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나물에 그 밥 이고
나의 이념과 정치관에서 보자면
모든 선거와 투표는 없는 게 최상이지만
담배나 아편, 홍차나 커피처럼 꼭 있어야 한다고 대부분이 우긴다면(그러고 보면 기호식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군요)
나는 차라리 제비뽑기(이건 일본의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예전 주장)로 정하면 어떨까? 하고 우기고 싶어요 아니면
흡연구역처럼 각자 다른 정치권력지향구역을 만들어 따로 사는 것도 나름 괜찮을 듯도 하고
김사인의 시 끝 구절처럼
말이 될 런지는 모르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