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산문

겨울비

빛의 염탐꾼 2008. 8. 24. 06:17

과천은 벌써 눈이 두번 내리고 또 어제는 비가 내렸지요.

11월,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머쓱할정도로 큼직한 눈송이를 하고 천둥을 동반하고서 말입니다.

천둥소리에 섞여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이상기온이라는 말을 내뱉았더니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누가 분석적인 사람 아니랄까봐' ......

 

세상을 참 머리아프게 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언제나 굳어있는 무표정한 얼굴은 딱히 세상사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저 현실부적응에서 오는 나약한 도피의 방편일 뿐인데 말입니다.

 

실용적인 도서를 제외한 책과도 거리를 두고 날마다 듣고 뱉은 말이 온통 실용을 빙자한 거짓말 뿐인

날들 속에서 제대로 된 문장과 어리석을 정도로 맑은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곤 합니다.

 

 

겨울비

 

 

꿈결 속으로 유년의 언덕배기 친구들이 아른거리고

아침마다 어줍잖은 해몽으로

고향으로 수화기를 들곤한다 찢어진 선거 공고판

미소 띤 후보자의 사진 앞으로는

여느 해보다 더한 찬바람이 불어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며 무심하게 지나가는데

은반의 하늘로 울려 퍼질 캐롤송도

내일을 점치지 못하는 기온에 묻혀 들려오지 않아

저마다의 아비들은 쓴 약 같은 담배연기를

하늘로 지펴 올리며 술잔을 부딪치고

아이들은 이불을 걷어차고도 깊은 잠에 빠진다

아침마다 신문들이 백지공약을 색칠하며

부수를 늘리고 예전같은 미담들이

무엇인가에 밀려나 들려오지 않는 1992년 12월

이도 저도 한 철 반짝일 뿐

세상을 녹여줄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일까

올해는 겨울추위가 제 모습을 찾을 것이라는 소문이

귓전을 울려 겨울나무들 꼿꼿이 서서 떨고 있는데

운좋게 당첨되어 입주한 아파트의 난방비를 걱정하면서

부쩍 자라난 아이의 바지자락을

내려 바느질하는 가난한 엄마의 눈매

창 밖 가로수 위로

길몽 같은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오래된 시뭉치 속에서 발견된, 1992년 12월이라는 구체적인 시점이 명시되어 있는,

어언 15년전, 그사이 벌써 대통령이 세번 바뀌었나. 그러고보니 조금씩 떠오르는 풍경들, 

그해 겨울,  백기완(백기완선생은 지금 어디.... 언제가 월드컵 축구대표들에게 연설을 했다는

전혀 엉뚱한 소식을 들은 것도 같은데) 민중후보선거대책본부 대학문예패를 지도한다는 핑계로 그들과 함께

정치선동문과 하등 다를바 없는 시를 토론하던 때, 그시점인 것 같다. 

문학과 정치를 구분못하던, 경계없이 자주 왔다갔다하던, 낮엔 그렇게 선동문 비슷한 시를 쓰고

밤엔 위의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뭣모르게 왔다갔다 했지만 분명한 건 펄펄 살아있었다는 느낌, 

위 시를 쓰고 나서 몇일 후, 명절 아니면 가지도 않던 고향을 투표하러 간 걸 보면(그때까지만 해도 고향으로

주민등록이 되어 있었다), 막차를 타고 대구에서 울진까지 그 먼 거리를 달려가서 하루밤 자고 투표만 하고

아침 일찍 다시 돌아온 기억,

또 하나 부모님이 왜 왔냐고 묻길래 누구를 찍어러 왔다고 했더니 그 다음날 부모님이 나에게 하던말,

'나도 그 사람 찍었다' 아마 부모님 생각엔 그 사람이 되면 나도 떳떳한 직장자리를 잡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도저도 다 재미있는 기억인 것같다.

 

어제 한바탕 내리는 겨울비속을 걸으며, 조금은 감상적인 기분에 그리고 또 다시 돌아온 선거가 떠오르며, 위의 시가 생각났다. 지금 읽어보니 허점 투성이의,  '가난한 엄마, 바지, 운좋은'등등 이론적으로 멀리 했지만 어쩔수 없이 보이는  민중주의의 관점과 언제나 우리를 헷갈리게 했던 '전망제시'로 보이는 결말. 그러고 보니 이젠 거기서는 꽤나 자유로운것 같은데 어쩌면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인지도.... 여차여차하여 다가오는 이번 대통령선거는 처음으로 안할 것같은(다른 선거는 안 한적이 많이 있었지만) 느낌이 든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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