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산문

평등의 가치에 대한 단상

빛의 염탐꾼 2008. 8. 24. 06:11

 “승리를 장담하진 않는다. 올림픽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얼음판 위니까. 이건 미끄럽다. 삶처럼.”


7번째 유럽피겨선수권의 정상을 차지한 러시아의 슬러야츠카가 이번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겠냐고 질문한 기자들에게 한 말 이랍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무조건 금메달을 따겠다고 장담하고 그러다가 못 따면 시상대에서 울상이 되어버리는 우리 선수들의 인터뷰와 비교해보면.....


무엇의 차이일까요. 국가의 성숙도(문화)의 차이, 인간의 성숙도(개인성)의 차이, 그도 저도 아니면 러시아와 한국에서의 메달의 연금차이일까요. 세 번째라는 물음이 은연중에 떠오르는 걸 보면 자본의 촉수가 뿌려대는 건조한 기운이 내 삶을 통째로 점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상황을 버무려서, 살아온 세월에서 오는 진정성의 차이라고 하면 이 건조함도 조금은 희석될 수 있을까요. 남발해서는 안 돼는 단어인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하여간 "삶은 미끄럽다"는 그의 표현이 맘에 듭니다. 꾸며낸 이미지와 가벼운 말들이 범람하는 인터넷 한 구석에서 눈에 들어온 한 구절. 그녀가 이번 올림픽에서 번번히 놓친 금메달을 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요 몇 일 관문체육공원에 나가 농구를 하였지요. 12월부터 한동안 손이 시려 엄두도 못 내었는데 날씨가 풀려서인지 학생들이 조금씩 보이더군요. 삼한사온 이라는, 겨울날을 대변하던 단어도 올해엔 사라지고 없습니다. 12월부터 보름 넘께 이어지던 추위가 다시 보름넘께 봄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 겨울철 평균기온을 올해가 뚝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1월의 봄날씨가 그 수치를 평균치로 다시 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균기온, 평균소득, 평균의식, 삶의 평균질, 중산층’ 등등, 그 말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평균’ ‘평균율’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지요. 그 말이 가져다주는 보이지 않는 비타협적이고 독재적인 힘 말입니다. 일체의 다양한 형태를 왜곡시키기며 말입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OECD국가의 평균’ ‘일인당 평균소득’ 이라는 말이 가진 무서운 최면술 같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겠지요. 그렇게 평균이라는 단어는 사회 곳곳의 어둡고 소외된 미세한 부분들을 감추며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겨울상품 특수를 불렀던 12월의 추위도 2월의 느낌을 가져다준 1월의 느낌도 어쩌면 곧 ‘예년과 비슷한 평균기온’이라는 단어 하나에 묻혀버리게 될 테지요.


고교평준화니 자율화니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까요. 평균이라는 이 유령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우리의 머리속에서 자꾸만 밀어내고 있다는 좀 비약적인 생각(비약 아닌가요?)이 들었다는 겁니다. 평등이라는 오랜만에 떠오른 그 단어가 내게 좀 간지러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평균이상을 향하려는 인간공동체의 욕망이 평등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 평균의 존재를 위해서 그 보다 낮은 수치와 높은 수치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해방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추상성.....


(사실은 여기서부터 비약입니다) 해방과 평등은 존재가치가 아니라 영원히 경향성으로 남아있는 가치일 수밖에 없다는..... 그 가치의 실현을 선언하는 순간 세상은 정지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사회주의가 복잡미묘한 자본과 권력의 속성을 보지 못하고 노동해방의 평등한 세상의 실현을 선언하는 순간 모든 역동성은 사라지고 앙상한 구호만 남았듯이(물론 기존의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하였느냐 아니였느냐는 다른 문제이겠지만), 평등과 해방이라는 가치의 진성성은 그 가치의 존재에서보다는 그 가치를 향한 경향성에서만이 빛을 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물론 예전부터 쭉 든 생각입니다만 말입니다. 그렇게 경향성은 위험하고 누추한만큼 역동적이고 존재성은 명백하고 거대하지만 그로인해 굳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비타협적인 깨달음처럼 말입니다.


중국의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어쩌면 경향성의 역동성을 선택하지 않았나 봅니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평등한 나라라는 앙상한 이념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고정불변의 권위보다는 ‘이후에도 우리는 보다 나은 좀 더 평등한 세상을 바란다’라는 가치의 경향성을 택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영향은 제외하고 하는 말입니다. 몇일 전 학원의 중국인 강사가 그러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빨리 빨리를 왜치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중국도 머지않아 그렇게 돼지 않겠는냐고..... 그러니 강사가 정색을 하고 한마디 하더군요. 우리는 차근차근 기본을 닦아와서 그렇진 않을 거라고요. 물론 우리나라처럼 압축된 근대의 틀을 밟지 않아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발달이 왝곡되어 있지는 않다는 얘기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사회주의국가에서 펼치는 자본주의의 실험에 신중하게 동참한다는 자존심이 담겨있는 말 같았지요. 그날은 몰랐지만 어쩌면 그 말속에서 나는 평등과 해방의 가치를 향한 그들의 경향성이라는 정리 안 된 의문을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 가치의 존재유무와는 관계없이 그 가치가 분명 아름다운 것이라면 자신이 고정된 존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실현된 가치보다는 꿈꾸는 가치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내가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사고의 정리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 맞지도 않은 언어로 범벅이 된, 그러고 보니 서두에서 한 생각을 바꿔야 겠군요. 그녀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건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그저 그가 꿈꾸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면 그만일 테지요. 역동적인 아름다움은 미끄러질 때가 많은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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