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시집 '햇빛 속의 호랑이'(세계사 시인선 85)
의미의 중첩과 더불어 최정례의 시에서는 시간 역시 중첩되어 나타난다. 그녀의 시는 거의 대부분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 미래 시간의 짐작으로 복합되어있다.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는 뚜렷하게 경계가 그어져 있지 않고, 시간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흐른다. 현재 여기에 있는 나는 숱하게 반복되는 시간의 한 지점에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눈앞에서도 다시 시간은 반복되고 중첩된다.
- 문혜원의 해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의 울음과 분노와 슬픔을 감추고' 중에서
표제시인 '햇빛 속의 호랑이'는 위와같은 상황을 잘 연출하고 있는 시다. 다른 시들과 달리 의미전달도 비교적 쉽다.
나는 지금 두 손을 들고 서 있는 거라
뜨거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라
부동자세로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거라 빳빳
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불타는 초
록의 호랑이 눈깔을
햇빛은 광광 내리퍼붓고
아스팔트 너무나 고요한 비명 속에서
노려보고 있었던 거라, 증조할머니 비탈밭에서 호랑이
를 만나, 결국 집안을 일으킨 건 여자들인 거라, 머리
가 지글거리고 돌밭이 지글거리고, 호랑이 눈깔 타들
어가다 못해 슬몃 뒤돌아 가버렸던 거라, 그래 전재산
이었던 엇송아지를 지켰고, 할머니 눈물 돌밭에 굴러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러다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식의 호랑이를 만난 것이라
신호등을 아무리 노려봐도 꽉 막혀서
-다리 한 짝 떼어놓으시지
-팔도 한 짝 떼어놓으시지
이젠 없다 없다 없다는데도
나는 증조할머니가 아니라 해도
-머리통 염통 콩팥 다 내놓으시지
-내장도 마저 꺼내 놓으시지
저 햇빛 사나와 햇빛 속에 우글우글
아이구 저 호랑이 새끼들
또 다른 시 한편, 위의 평에서는 좀 먼 듯하나 재미있는 소재를 읽기 쉽게 잘 요리한 작품, 그래서 의미의 중첩과 시간의 중첩을 통한 삶의 깊이 드러내기에는 부족한 듯한, 곽여사와 허여사가 읽어보면 좋을 듯한 '자개장롱 속으로'
당초무늬를 따라가요
끝없이 이어지는 덩굴을 따라
모란 꽃나무를 돌고 돌아요
현란한 저 모란과 여기 새겨져
함께 갇히자구요
당초무늬는 또 파도가 와 부서지는
바윗가의 비현실로 달려가네요
불로초처럼 파도의 꼬부라진 혀처럼
송학에 달을 구름을 지나고 있어요
무릉은 365일 보름달이 뜨구요
당신은 늙어가구요
무릉은 멀지 않아요
환한 그곳 어디 들어설 자리
저 늙은 거북을 내쫓고 차지할까요
당신 나 일생을 다 지불하고
당초덩굴을 그러잡자구요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구요
복숭아 세 알은 손잡이 위에서
익을 대로 익어 기다리네요
학은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지그시 밟고
만날 천날 그러고 있어도
죽지가 아프지도 않고
사슴은 목을 빼 향기만 취해도
백년을 산다네요
무릉으로 가는 문인데
썩어 문드러질 리 있겠어요
당초무늬처럼 길게 손 뻗어
열자구요
세상에 없는
끔찍하게 아름다운 무릉도원이
장롱 문짝 위에 대칭으로 펼쳐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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