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독서일기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빛의 염탐꾼 2008. 8. 24. 06:34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3 - 진중권

 

 

"그는 그것을 유토피아라 불렀다. 그것은 그런 곳은 없다는 뜻이다." 그 이야기는 바로크 시대의 어느 시인의 인용과 더불어 시작한다. 벤야민은 미디어에 유토피아적 희망을 걸었지만, 귄터 안더스(Gunther Anders, 1902-1992)는 미디어에 미래를 검은색으로 채색한다. 보르헤스는 아마도 귄터 안더스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지친자의 유토피아]는 안더스가 묘사한 디스토피아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자기가 살다온 세계를 이렇게 회상한다.

 

"인쇄된 사진과 글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사실적이었지요. 그래서 단지 인쇄매체를 통해 공표된 것만이 진실했다고나 할까요?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진으로 찍혀야 한다는 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유일무이한 개념이었지요."

 

하지만 아득한 미래에 사는 그곳의 주민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사실에 지쳐 아예 사실을 포기하고 의심과 망각의 예술을 배우며 살고 있었다. 백 살이 넘으면 그들은 철학이나 수학을 공부하거나 혼자 두는 장기를 둔다. 이마저 지루하면 자기가 원할 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삶의 주인이 된다. 둥근 돔을 얹은 탑을 가리키며 '그'가 말한다.

 

"소각장이에요. 안에 죽음의 방이 있지요. 내 기억에 아돌프 히틀러던가 하는 한 박애주의자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본문 309PP [팬텀과 매트릭스] 중에서-

 

보르헤스의 소설 [지친 자의 유토피아]의 주인공이 내뱉는 현실은 충격적임을 넘어 서늘한다. 소설 속의 매체인 사진을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의 다른 매체로 확장하면 귄터 안더스의 미디어에 대한 묵시론적 암울한 미래가 보일 것이다.

백남준은 TV앞에 불상을 하나 배치해놓고 제목을 'TV-부처'라 명명하고 있으며(1974) 첼로를 켜는 여인의 가슴에 TV수상기 두대를 얹혀놓고 제목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레이저'로 붙이고 있다. (1969) 하여간 가상세계는 우리 현실을 거의 장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시물라시옹]에서 그는 미국 자본주의에 숨은 치부을 드러낸다. 사실은 미국 사회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인 셈인데 이걸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는 존재한다고 한다. 유치함은 디즈니랜드에만 있고 그 밖의 세계는 유치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이....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식 자유주의의 허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 이라는 그의 분석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부정과 부패는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 아니라 닉슨 이라는 한 개인의 부덕으로 처리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조그만 부정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허상을 다시 한 번 심어준 것이다. 그럼 실시간으로 중계되며 무너지던 쌍둥이 빌딩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다시 한번 보드리야르의 말이 기대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귄터 안더스는 아직 현실의 이름으로 가상을, 진리의 이름으로 허구를 비난했다. 여기에는 현실이 있고, 그것의 존재를 가상이 위협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에게서는 이 관계가 거꾸로 뒤집힌다. 그에게는 가상이 있고, 그것의 존재를 현실이 위협한다. 한마디로 현실을 위협하던 가상이 어느새 현실을 잡아먹고, 주변으로 밀려난 현실이 가끔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사실이기에.....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모르겠다. 

오늘은 도서관에 가서 [지친자의 유토피아]가 나오는 보르헤스의 소설과 귄터 안더스, 보드리야르의 책을 빌려와야 겠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좀 보고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