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
낫을 간다 햇살 눈부신 한낮, 창고 속에 처박아두었던 것을 꺼내 얼마 만인가 짓무른 상처의 딱지, 멍든 슬픔의 얼룩에 녹슬며 날을 접었던 그래, 웃자란 모든 것은 베어버리자 덥수룩한 피부에 물을 적시면 손가락 사이로 이는 물거품, 검붉은 녹물이 흘러내리고 이런, 흥건한 피, 피, 피
잠시 한눈을 팔았어 결을 잘못 잡았군 칼날의 이가 빠지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빼고 스스로 칼이 되어야지 그런데 이상하다 피를 보고도 아프지 않다니 구석구석 숫돌이 지나간 자리마다 날이 서는데 처음처럼 피가 돌 수 있을까, 첨벙첨벙 물 속에 담구었다가 낫을 꺼내드니 누구인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파르스름한 낯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