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난중일기를 읽는 밤

빛의 염탐꾼 2017. 12. 9. 17:47

난중일기를 읽는 밤

 

 

 

since 1989 육즙

 

그 해 오월, 외로움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 들어간 그 단체에서 나에게 부과된 첫 임무는 검푸르게 불어터진 채 광주의 어느 저수지에서 떠올랐다는 대학생의 변사체 사진을 자정 넘어 새벽까지 시내 담벼락에 붙이는 것 이였다 모두들 내 몸에서 흘러내리는 육즙에서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건 어쩌면 그 때부터 내 몸에 배인 푸른 수액과 무정부의 냄새 때문일지 모른다

 

 

시공인(時空人)

 

새벽녘에 빗소리 들은 듯도 한 데 깨어보니 흔적도 없어 이리저리 물어보니 어떤 이는 내렸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내리지 않았다고 하네 그저 꿈이었을까,

 

 

꽃놀이

 

산벚이 만개하는 밤엔 일곱명이 나를 데리러 온다

 

 

욕구 불만

 

처음엔 누런 황무지였어요 어느 날인가 제복 입고 권총 찬 이들이 말 타고 찾아와서 울타리를 치고 초록물감을 뿌리더니 봄이니 희망이니 꿈이니 하는 단어들을 주문처럼 외워대며 그 땅을 모두 차지해 버렸어요

 

    

가을

 

풍경의 가시거리가 늘어날수록 마음의 가시거리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12

 

남은 것은 마른갈대와 바람 뿐 이여서 숨어 흐느끼는 강물소리마저 들리지 않네

 

 

나는 자연인이 아니다

 

숲 길 걷는데 발밑에서 꿩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오른다 겁에 질려 놀랐을까 아니다 반가워서 그랬는지 모른다

 

 

꿈나라 일박

 

꿈나라에서 일박 했어요 거리는 온통 개똥밭 사람들은 발밑의 개똥을 피하기 위해 발을 동동 거리며 붕 붕 떠다니고 있었어요 어느 거리를 지나가는데 얼굴이 해맑은 청년이 나에게 다가와서 도를 아느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하니 공부를 해 보자며 자꾸 어디론가 가자고 했어요 도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누가 이기나 하고 따라갔더니 개량한복 입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위해 제를 지내야 되니 돈을 내라고 했어요 돈이 없다고 했더니 표정을 바꾸고 도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에게 쌍욕을 퍼부었어요 뒤도 안 돌아본 채 빠져나와 또 다른 거리를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모여 천국이 가까워졌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어요 모두들 천국행 열차를 탄 사람들처럼 얼굴이 들떠 있었어요 다시 거기를 빠져나와 또 다른 거리를 지나가는데 하늘에서 복권이 비처럼 내렸어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대박을 외치며 그걸 줍고 있었어요

 

 

상수원보호구역

 

적폐(積弊)의 모래언덕,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나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요? 변비(便秘), 비밀스럽게 숨어있는 똥 좀 먹어 볼까요?

 

 

난중일기를 읽는 밤

 

()이 거처하고 있는 곳은 성벽처럼 철조망이 둘러쳐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곳입니다 그 어떤 간신배의 악플에도 흔들리지 않는 20인치 모니터 속, 하늘에는 여러 개의 태양이 떠 있고 땅에서는 날마다 칼바람이 불어요 동지도 적도 사라지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마우스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쉴 새 없이 댓글을 먹고 싸는 도덕도 이념도 신이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 하던 시절에나 있었던 이야기가 되는 이 곳, 신에게는 아직 열두망의 네트워크가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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