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우기 2

빛의 염탐꾼 2020. 8. 10. 13:09

   우기 2

 

 

 

   안개는 언제부터인지 늘 산중턱에 걸려 있고

   마르지 않는 빨래는 며칠째 요지부동 세월을 죽이고 있다

 

   우기의 마음은

   습기 먹어 무거운 나무 문짝처럼

   쉬이 열릴 줄을 모르는데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거 잊지 말거라 네 키도 그렇게 쑥쑥 커간단다 아가야

   가는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시대를 초월하는 노모의 혼잣말

   내 키가 이 모양인 게 비를 적게 맞아서 라고요? 도대체 콩나물시루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토종 콩 재래 콩 제아무리 뛰어난 수입산 돌연변이 유전자조작 콩나물 으로도 제 키는 이제 자라지 않아요 차라리 밖에 나가 비를 쫄딱 맞고 감기나 걸려버려라고 악담을 하시지 그래요?

 

   평소에는 잠꾸러기였지만

   우기에만큼은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갔어요

   그게 다 식구수보다 턱없이 부족한 우산을 선점하기 위해서라는 걸

   그땐 다들 모르는 눈치였어요 아니

   모른 척 했었다고요

   우기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 해지고 잠이 없어지는 이상한 이 생체리듬은 아마 그때 시작 되었나 봐요 어머니

 

   노랑 우산 빨강 우산 찢어진 우산이 찢어진 콘돔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

   키와 콩나물의 상관관계만큼이나

   비와 그리움의 상관관계도 억지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아침 일찍 읍내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간 노모는

   하루에 몇 번 없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어느 간이정류소 처마에서 비를 긋고 있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그대여

 

   늘 그랬듯

   오늘도 그리움의 띠는

   흐리고 가끔 비 혹은

   산발적인 빗방울 되어

 

   넋 놓고

   오르락내리락

 

   또 어쩌면 잠시

   내 마음의 산간내륙을 지나가는 소나기 되어

   나를 내 앞에서 하얗게 지워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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