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 2
안개는 언제부터인지 늘 산중턱에 걸려 있고
마르지 않는 빨래는 며칠째 요지부동 세월을 죽이고 있다
우기의 마음은
습기 먹어 무거운 나무 문짝처럼
쉬이 열릴 줄을 모르는데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거 잊지 말거라 네 키도 그렇게 쑥쑥 커간단다 아가야
가는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시대를 초월하는 노모의 혼잣말
내 키가 이 모양인 게 비를 적게 맞아서 라고요? 도대체 콩나물시루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토종 콩 재래 콩 제아무리 뛰어난 수입산 돌연변이 유전자조작 콩나물 으로도 제 키는 이제 자라지 않아요 차라리 밖에 나가 비를 쫄딱 맞고 감기나 걸려버려라고 악담을 하시지 그래요?
평소에는 잠꾸러기였지만
우기에만큼은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갔어요
그게 다 식구수보다 턱없이 부족한 우산을 선점하기 위해서라는 걸
그땐 다들 모르는 눈치였어요 아니
모른 척 했었다고요
우기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 해지고 잠이 없어지는 이상한 이 생체리듬은 아마 그때 시작 되었나 봐요 어머니
노랑 우산 빨강 우산 찢어진 우산이 찢어진 콘돔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사실
키와 콩나물의 상관관계만큼이나
비와 그리움의 상관관계도 억지스럽긴 마찬가지인데
아침 일찍 읍내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간 노모는
하루에 몇 번 없는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어느 간이정류소 처마에서 비를 긋고 있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그대여
늘 그랬듯
오늘도 그리움의 띠는
흐리고 가끔 비 혹은
산발적인 빗방울 되어
넋 놓고
오르락내리락
또 어쩌면 잠시
내 마음의 산간내륙을 지나가는 소나기 되어
나를 내 앞에서 하얗게 지워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