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가을

빛의 염탐꾼 2020. 9. 27. 10:47

   가을

 

 

   학생체벌로 꿀밤 먹이기까지는 허용하겠다는 나무나라 교육부장관의 발표가 있은 후 나무나라 교원단체들이 일제히 그 조치를 환영하는 성명을 내었고 이에 맞서 학부모단체와 일부 시민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가운데 꿀밤 먹이기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나 우리도 참나무과다 참교육 가는 길에 왠 차별이냐며 너도밤나무를 선두로 한 밤나무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나무나라 거리는 온통 밤나무들이 던진 밤송이들로 뒤덮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나무들이 밤송이에 맞아 응급실로 실려가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나무나라 대학입학시험에는 참나무속 여섯 나무를 비교 서술하라는 내용이 언제나 단골문항으로 등장했는데 이게 로또번호 여섯 자리 맞추기에 버금가는 나름 생태에 관해서는 목에 힘을 준다는 학생들도 헷갈리기가 일쑤라서 떡갈 신갈 굴참 졸참 상수리, 일주일만 지나면 말짱도루묵이 되고 그러기를 몇 번 나무나라 학생들은 생태주의자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가을이 와서 눈앞에서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져도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나무나라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 때 서로 도토리를 선물하는 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는데 그 도토리들이 알고 보니 온라인에서나 먹힐 뿐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 이여서 컴퓨터 서랍 안에 숨겨두고 까마득히 잊어먹고 살고 있었고 나무나라 부모들은 이렇게 가다가는 아이들의 기억력이 청설모나 다람쥐 수준으로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기우를 달고 살았으며 입시철이 가까워지는 가을 무렵이면 도토리가 아이들의 기억력을 증진시킨다는 검증조차 안 된 소문이 전국을 휩쓸어 티브홈쇼핑 전체가 도토리묵을 비롯한 도토리 관련 제품들로 도배되었고 예전 묵사발체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떤 어른 나무들이 이 현상을 지켜보며 혀를 차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로 전락한 도토리가 학부모들 특히 엄마들 사이에서 품귀현상을 빚자 고구마가 대체식품으로 등장하였는데 일반고구마 보다 밤고구마나 꿀밤고구마를 선호하는 엄마들의 기호에 편승하여 일반고구마에 몰래 밤과 꿀을 첨가하여 팔다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장사꾼도 더러 있었다

 

   여전히 생태주의자의 꿈을 접지 못한 소수의 학생들은 대학입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사당오락의 기치 아래 참나무속 여섯 나무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공부에 지쳐 깜박 졸다가 어떤 나무가 조금씩 다른 여섯 가지 이파리를 매달고 흔드는 기괴한 꿈을 꾸다 발버둥치며 깨기도 했다

 

   그런 날 아침이면 아침까지 거르며 끝내 생각나지 않는 참나무속 한 나무의 이름과 씨름하며 등교를 했지만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는 것은 역시나 선생님들의 꿀밤 세례였는데 어떤 친구들은 도토리들 키가 다 같은 것은 아니잖아요 하며 씩씩댔지만 꿀밤을 피하진 못했고 또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덜떨어진 기억력의 원인이 좋은 유치원을 나오지 않고 참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는 억지주장을 펴다가 따따블로 꿀밤을 맞기도 했다

 

   독사과 선생들이 남몰래 중지힘을 키우는 운동과 처방을 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교정을 한 바퀴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가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선생님들의 중지손가락 끝이 기형적으로 비대해지고 나무나라 교정에서 이마에 혹 달린 아이보다 안 달린 아이들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지고 그렇게 교육부의 체벌규정 발표 이후 새로운 학교풍경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와중에 어떤 학교에서 어느 되바라진 학생이 꿀밤을 먹이는 선생님의 주먹을 움켜쥐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어진 그 학생의 항변 섞인 질문은 자신들이 유치원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병아리반에 들어가는게 더 나은지 도토리반에 들어가는게 더 나은지에 대한 것이였고 이 질문은 반 전체 학생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얼토당토않은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선생님은 어리둥절함도 잠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뒤이어 우리들은 이미 때를 놓쳤으니 모두 참새반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직하고 짧게 말하고는 고개 들어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은 바야흐로 무르익은 가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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