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용용

빛의 염탐꾼 2021. 2. 8. 17:24

용용

 

 

 

죽겠지만

힘깨나 써보고 싶겠지만

장미보다 용이고 싶겠지만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

대대적인 창문 청소를 했는데

꽃무늬 창문도 그렇지만

용무늬 현관문은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네요

끼인 먼지가 언제까지?

참 오래 갈 듯도 해요

 

홈 파인 곳이 너무 많다는 거

 

그러고 보니 소설가 박민규가

용자 네 개를 가로세로로 붙여

말 많은 절자를 만든 이유를 알겠어요

 

꽃무늬보다 용무늬 지우는 게 더 어렵다는 건

문신업계 종사자가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이고

1994년 지어진

경상북도 오지 소작농 가문 우리집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문 청소하는데

복사꽃 살구꽃 그게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닌데

그보다 더한

현관문에 커다랗게 아로새겨진 쥐라기공원

 

일찍이 시인 최정례는

이 땅의 흙수저들에게 희망과 비애를

동시적으로 심어 주겠다고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시를 써재꼈지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어떤 정치적인 놈(알고 보면 이무기)이 나타나서

가재다 붕어다 미꾸라지가

용보다 더 낫다고 외치더니

책임지지도 못한 천기누설로 인해

하늘로 승천했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입디다

 

이태리 로마로 가기 위해 환승했던

용의 비늘로 가득 찬 베이징 수도공항에서

하마터면 나는 길을 잃을 뻔 했지요

용하다는 건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지난 세기 PD진영의 이론적 대부였던 신현준 형은

사실 지금도 용하기는 한데

그게 미아리 색색등불에

미치는지 못미치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해서

 

솔직히 밟히자면 나란 놈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도 아니고

더더욱 자수성가 항아리도 아니라서

 

용트림 등용문

용두사미

그딴 거

다 때려치우고

 

청소업계조차 화들짝 놀랄

창문 청소 구름 청소

한 번 했더니 떡실신

 

이제 다시는

용쓰지 않을랍니다

 

사실

용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인간의 상상력이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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