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어디론가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어요 도중에 지난세기 이십대 때 요절한 어느 시인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었는데 그 시인이 누구이고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앞에서 보았을 때 분명 미소년의 형상이였는데 내가 오던 길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백발의 할아버지 였어요 그가 동서남북 방위가 불분명한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어떤 계곡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농담인지도 여백인지도 모를 안개 가득한 어떤 고개를 넘어가는데 가도 가도 고개 마루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리가 아파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과 벼락이 치고 비를 뿌렸어요 비가 그치자 사방으로 천길 바위들이 나타나서 겹겹이 나를 둘러싸고 여기저기 처음 보는 괴상하게 생긴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되지 않는 동물들이 한없이 짖어대었어요 울음소리가 이 세상의 음성이 아닌 듯 했어요 내가 아는 온갖 동물의 이름을 갖다 붙여 보았지만 수상한 생김새며 음흉하고 교교한 그 울음소리에 근접하는 이름을 찾아내지는 못했어요 그들의 울음소리를 피해 어느 작은 계곡으로 접어들었는데 정말이지 그 곳엔 도화 만발한 별유천지 비인간 인적은 간 데 없고 역시나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꿈인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어보았지만 하도 걸어서 아무런 감각이 없었어요 또 한참을 가서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어느 폭포 앞에 이르러서는 눈앞이 아찔해져서 그만 깨어날까 싶기도 했지만 떨어지는 폭포수에 정신이 나가 우두커니 오랫동안 쳐다보았어요 그 자세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폭포 위였고 내 앞에는 커다란 동굴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어요 다른 우회로가 보이지 않았기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할 틈도 없이 암흑천지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 곳은 천장에서 솟아난 온갖 종유석과 바닥을 흐르는 물길로 인해 한걸음조차 떼기가 힘들었는데 어둠 속의 짐승처럼 자꾸만 넘어져서 온몸에 멍이 들고 사지가 아파왔어요 주변은 온통 죽은 동물들의 뼈로 가득하고 무서워서 그만 주저앉아 울다보니 문처럼 생긴 동굴 벽에 여러 숫자와 알파벳과 이상한 기호들이 붙어 있는 게 보였어요 비밀의 문을 여는 암호인가 싶어 다가가서 한번 조합해 보았더니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 오늘 당장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를 바꿔야지 하는 다짐을 하며 조합을 바꿔가며 두번 세번 열번 백번 벽은 끝내 열리지 않고 온몸에 경련이 일고 무서워서 발버둥 치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고 창밖을 보니 바야흐로 한겨울 티브에서는 공인인증서가 곧 폐지될 거라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