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서산 문제는 언제나 자기중심주의에 있고 자기중심주의적인 나의 시점은 여전히 서쪽을 향해 있다 붉은 해가 서산을 발갛게 물들이는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동구 밖에 나가서 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삼십리 고갯길을 걸어갔다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은 노을 속의 새들이 빗살무.. 짧고 길게/자작시 2020.03.01
곶감 곶감 햇볕 짱짱한 십일월의 어느 날,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염라대왕이 사자들을 풀어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존재들을 지옥으로 모두 불러들였다 뜬금없고 터무니없는 이 조치는 세상 평화를 위해서라는 듣기 좋은 문구로 포장되었지만 알고 보면 자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에 대한 염.. 짧고 길게/자작시 2019.11.06
국화 국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장안의 화제가 된 후 누님이 없는 전후세대 사내들은 결핍감 때문에 참 슬펐다지 그들은 술에 취해 쓰러진 다음날 아침이면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초라한 여인숙에서 어김없이 황량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보았다지 거울 속으로 보이는 것이 한 송이 국화.. 짧고 길게/자작시 2019.11.06
인사돌 인사돌 사는 게 전쟁 같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네일샵에 가서 큐티클을 받고 네일아트를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 더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을지 더 예술적으로 할퀼 수 있을지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할퀴고 간 상처엔 성조기만 나부껴 반전반핵가 이십대 집회에서는 늘 이 노래.. 짧고 길게/자작시 2019.10.07
추분 추분 한동안 싸늘했다 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한동안 조금 더웠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추분 무렵이었다 자주 사칙연산을 푸는 꿈을 꾸었는데 다른 문제에 늘 똑같은 답을 달고 발버둥치며 깨어났다 로또복권을 살까 말까 꿈속의 숫자를 헤아리며 길을 걷는데 떨어진 은행알을 .. 짧고 길게/자작시 2019.09.29
벤치의 넓이 벤치의 넓이 벤치는 혼자서는 절대 인생 샷을 건질 수 없는 둘이서 수줍게 손을 잡고 앉아 있어야 어울리는 넓이를 가지고 있고 그 뒤로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하품 나는 길고 긴 축사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만약 그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 세 사람이 된다면 아마도 영역싸움을 위해.. 짧고 길게/자작시 2019.09.18
똥집 똥집 끝이 없는 모래밭을 걸어가고 있어요 삶은 가만히 있어도 어떤 거대한 물결에 밀려 하루아침에 불쑥 떠오른 모래톱과 삼각지 같아서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운동화나 구두 뒷굽에 자꾸만 모래알이 쌓여요 허리에 태엽을 감고 제자리를 맴도는 나는 천년이나 비가 오지 않은 이곳에서.. 짧고 길게/자작시 2019.09.12
구월 구월 초식동물들의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오르고 어떤 무덤가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처서 백로 다 지나고 한 조각의 햇빛조차 아까운 노부부가 서로의 흰 머리카락을 비비며 조는 사이 제철 맛을 잃어버린 끝물채소들이 더 많은 열매를 달고 빗물을 가득 채운 해골바가지처럼 길.. 짧고 길게/자작시 2019.08.28
빗소리 빗소리 자정 너머의 소리이다 정규방송 끝난 티브에서 흘러나오는 빗살무늬토기에 빗금 긋는 소리이다 개똥도 약에 쓸려니 안 보이네 그 곁에 모로 누워 내뱉는 어머니의 잠꼬대 소리이다 파티 끝낸 왕자와 공주들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벗는 소리이다 반짝거리는 유리구두와 황금빛 호.. 짧고 길게/자작시 2019.08.23
틈 틈 콘크리트 마당 여기저기 갈라지고 부서진 곳에 올라온 풀을 뽑는다 도저히 뿌리내릴 수 없어 보이는 곳에서 뽑아내도 뽑아내도 어디서 날라와 기를 쓰고 뿌리내린 잡초들 그래 틈이 생겨야 틈이 벌어져야 어쨌든 파고들 구석이 있지, 이를테면 틈이 나야 할 수 있는 것들 여행이다 취.. 짧고 길게/자작시 2019.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