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여름 산 같은/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오후의 때가 오거든/내외들이여 그대들도/더러는 앉고/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서정주, ‘무등을 보며, 전문)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듯 대동아공영권과 황국신민화를 부르짖었던 시인 서정주도 무등을 보며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6.25 동란 후 몇 년인가를 시인 서정주는 광주에서 기거하며 조선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동란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그 당시 대학의 교수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닐 정도였다. 내남없이 모두 궁핍하던 때인 만큼 점심을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고 불가항력으로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크고 의젓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무등산을 보며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문학작품을 둘러싼 서로 다른 해석과 친일과 관련된 그의 문학적 삶이 자발적 동원이냐 아니냐에 대한 많은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위의 시를 읽으면서 든 나의 생각 중 분명한 것은 어설픈 해탈과 달관은 날선 풍자와 해학보다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노래했고 그보다 앞서 많은 사람들을 향해 너른 품을 펼쳐 보이고 있는 무등은 그렇듯 등급이 없는 평등의 산인 것이다. 한문을 몰랐던 부드럽게 우는 법을 몰랐던 갑오년의 농민들도, 제국주의와 독재의 군화발에 숨죽이던 오월광주의 민중들도 무등의 고르고 넓은 능선을 보며 쓰리고 아픈 가슴을 혁명에 대한 굳은 의지로 바꾸었을 것이다.
하늘아래 모든 것엔 등급이 없다는 무등, 그 산을 오른다. 그러나 그 말은 현실 앞에 무력한 이상일 뿐이다. 평등가치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현실에선 나약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은 자연과 인간, 제국주의와 식민지로 갈라지고 다시 빈부의 차이로 이어지며 지배와 피지배는 공고해진다. 자연은 인간의 권력이 착취하는 최하층의 대상이 되고 그 위에 정보와 통신, 자본과 기술을 선점한 신자유주의의 제국은 시장을 미끼로 자연을 넘어 인간의 육체까지 계량화시키고 식민화 시킨다.
무등의 북동쪽인 북산을 오른다. 능선이 가파르다. 세상이 여기까지 오는데도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골고루 등 따시고 배부른 세상’을 향해 온 몸을 던졌던 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삶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른다. 넓게 이어지던 호남정맥 마루금이 북산을 지나 무등의 바로 아래에서 무엇인가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조릿대와 암석지대의 길없는 능선을 힘겹게 통과하니 정상의 능선부다. 공군부대의 허가를 얻어 그들과 동행하여 무등의 정상부를 통과한다. 누군가의 말로는 제주도까지 방어하는 미사일기지란다. 무등의 정상부 또한 현실이 그러하듯 평화와 공존이 아닌 폭력과 전쟁을 위한 시설이 독점하고 있구나! 어쩌랴,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구호는 헛말이다. 세상사에 등급도 차별도 없다는 말 또한 헛말이다. 무한경쟁의 틈바구니로 끌여들이기 위한 사탕발림이다.
군부대의 시설물이 둘러싼 천왕봉을 지나 다시 내려간다. 다른 곳에 비해 간격이 넓다지만 무등에서도 등고선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구나! 그게 세상사인가? 서석대와 입석대를 지나 장불재에 다다르니 여기가 산속인지 도심속의 어느 공원인지가 분간되지 않는다. 북산을 오를 때부터 넓어지기 시작한 등산로가 ‘민간인 출입금지’의 절대권력의 밀실(?)에 의해 좁아드는가 싶더니 서석대에서 폭을 늘린다. 등산로폭, 침식깊이, 나지노출폭 등 등산로의 훼손상황을 알리는 아라비아 숫자가 1미터를 훌쩍 넘기더니 10미터까지에 이른다. 사람의 삶이 이름을 얻으면 피곤해지듯이 산도 마찬가지다. 호남정맥의 이름없는 산을 지날 때와 달리 곳곳이 상처 투성이요, 요란한 문구와 소음이 산을 덮는다. 그렇게 이름은 명예를 낳고 권력을 부른다. 헛된 공약을 남발하는 것도, 속이야 어떻든 세련된 이미지로 포장해대는 것도 다 명예 때문이고 권력 때문이다.
백마능선을 지나고 926봉을 지나 안양산을 향한다. 호남벌이 한눈이 들어오고 뒤로는 무등이 본래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듣던 대로 무등이다. 편안하고 너른 가슴이다. 그런데 저 넓은 몸 속 곳곳은 상처 투성이다. 인간의 욕심과 평등의 가치는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충돌하면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인간 또한 자신도 모르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무등의 상처가 정상부에서도 깊이 패인 골짜기에서도 더는 깊어지지 않기를..... 그 또한 욕심이다. 안타깝지만 그저 바라볼 일이다.
무등을 오르는 오늘은 토요일, 단촐한 수의 탐사대가 말없이 빠른걷기로 일관하던 분위기가 약간 소란(?)스러워지고 보폭도 한결 너그러워(?)진 날이다. 광주녹색연합의 여성회원들이 다수 함께한 결과다. “새끼들 학교갈 준비는 해놓고 산에 왔냐”고 물었더니 교육부에서 실시하는 마지막 주 토요일휴무의 첫날이란다.
사람들의 휴일이 많으면 산의 상처는 더 깊어질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자연은 공존이 불가능한 존재인가? 아닐 것이다. 절대평등이야 있을 수 없다지만, 평등을 향한 가치추구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휴식이 있듯 자연에게도 휴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명계곡과 등산로에 대한 자연휴식년제는 대폭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우리들이 달콤한 휴식을 원하듯 자연 또한 휴식을 원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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