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구월
벼는 좀처럼 익지 않았다 양년의 이름을 단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가고도 비는 보름 이상 계속되었다 올 추석은 다 틀렸어요, 남쪽에서 또 초특급 태풍이 북상중이래요, 그래, 풋내 나는 것은 언제나 유산(流産)이야, 난리도 그런 난리는, 늘 뒤통수만 쳐대던 일기예보의 얄궂은 용어들에 섞인 어머니의 쿨럭거림, 들어보면 언제나 사라호 얘기였다
늪인가요, 수렁인가요, 빠져도 빠져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여기는 어디죠, 밤마다 산발한 여인네의 머리카락으로 내 잠을 어지럽히던 몹쓸 놈의 바람, 옛 동료들의 몽롱한 주문 속에서 발버둥치다 깨어나면 뒤늦은 진단으로 선고받은 것은 언제나 시한부라는 듯 외숙모님의 사망 소식이 들렸다 벼들은 쓰러져 있었다 아니 모든 광신은 쓰러져 있었다
보름달은 떠 오를까요, 믿음의 유산(遺産)치곤 지독해요, 내력이야, 잠재우지 마라, 상처받기 싫거든 같이 놀아라, 모두들 제자리를 찾아 떠났으니 닭모가지를 비틀고 화투짝도 좀 돌리렴
어머니의 중얼거림처럼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모든 의문들이 빗줄기에 패여 골이 깊어가던 그 해 구월
1999년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