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텃밭-생활의 발견

천규석 선생님 글

빛의 염탐꾼 2016. 11. 5. 01:32

고령화는 보이지 않게 그리고 천천히 경제를 마비시킨다. 늙어가면서 씀씀이를 줄이기 때문에 성장률을 떨어뜨리고 고용도 갉아먹는다.” (2008년 8월 27일 《조선일보》) <중략>노인들의 시장화되지 않은 자급노동을 통한 농업적인 삶이 시장의 적이라면 시장화되지 않은 전업주부들의 가사노동도 시장의 적이란 말인가? 같은《조선일보》 2008년 

 

9월 16일자에는 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주부의 가사노동이 1일 14시간 기준일 때 월 433만 원으로 재평가한 기사를 실었다. 주부 가사노동의 시장화와 그것의 가치를 시장가치로 환산하는데 대해 나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것은 시장화되어서도 안 되고 또 그 가치를 시장가치로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부 가사노동의 수많은 항목 중 예컨대 미취학 자녀 보살피기, 초등생 자녀 보살피기, 배우자 보살피기 등의 시간을 표준적으로 배분하기도 어렵지만 또 그것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예시항목에서 빠져 있지만 배우자와의 사랑 행위와 그 결과 아이를 임신해서 낳고 기르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능적 사……

 

 

- 천규석, 「낭만적 관점에서 본」 중에서(『천규석의 윤리적 소비』)

최고의 윤리적 소비는 자급소비

 

가사노동 등 자급노동의 가치가 궁금한 주부님들에게

 

발췌 내용의 제일 앞 쪽의 인용문은 2008년 8월 27일자 《조선일보》의 <조선경제> 면에 실린 기사 중 일부입니다.

노인들이 늙어가면서 씀씀이를 줄이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떨어뜨리고 고용을 갉아먹는 시장의 주적이 되었다고요?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까지 와 버렸는지? 노인들은 시장경제성장의 장애물이니 지금처럼 도시 변두리 농촌에 격리시켜 버리는 ‘고려장’도 모자라 이제는 어서 죽어 달라는 말이 아닌가요? 이 기사를 처음 접한 나는 말 그대로 망연자실, 억장이 무너지는 막막함에 한동안 말뿐 아니라 생각도 정지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될수록 불필요한 씀씀이는 줄이고, 자원은 절약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미덕인 줄 알고 있는데, 이렇게 사는 삶의 표본인 우리 농촌 노인들의 삶이 ‘경제성장’과 ‘고용을 갉아먹는’ 소비시장의 적이라니? 이 제한된 지면에 이를 어떻게 반박해야 될지 그 또한 막막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왜 삽니까? 소비하기 위해 삽니까? 살기 위해 소비합니까? 누가 경제성장을 원하고 왜 그것을 강제시킵니까? 부자와 기업들이 돈 벌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덕택에 없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이 고용당해 그 부스러기를 주어먹고 이만큼 잘 산다고요? 왜 노동자들은 자급자족으로 그냥 사람답게 살면 안 되고 기업이나 부자들에게 고용(예속)당해 그 부스러기로 살아야 합니까? 힘이 없으니까 그 길밖에 살 길이 없다고요?

천만에요. 고용당하지 않고도 사람답게 사는 길이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농촌의 노인들처럼 씀씀이를 줄이고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집 등을 자급하면 됩니다. 자급자족의 농촌식 삶은 과거에 그랬듯이 너무 가난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근대 이후의 가난한 농촌사회는 먹을 것만 자급자족이었고, 옷이나 집 특히 관혼상제와 자녀 교육 등은 자급자족 아닌 시장예속의 절름발이 자급자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주, 관료 등에게 부당하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없이 완전 자급자족 사회가 되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큰 기업, 큰 부자들은 없어지겠지요. 농촌노인들이 바로 그렇게 살기 때문에 부자신문인 《조선일보》가 그토록 ‘맹목적’으로 노인의 소비절약을 이 시장경제 세상의 철천지 원수인냥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왜 《조선일보》가 ‘맹목적’이냐하면, ‘한정된 자원’안에서 인류가 자손대대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녹색성장이 아니라 소비절약의 자급자족밖에 다른 대안은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급노동은 고용당하지도 고용하지도 않는 비시장적 노동이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절대가치입니다. 그래서 자급노동인 주부의 가사노동도 돈으로 계산 못할 절대가치입니다. 주부들이 가사노동을 버리고 시장노동에 편입됨으로 덕 보는 사람들은 소수의 이른바 전문가들과 부자들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여성들은 ‘피고용’과 ‘시장소비’라는 두 개의 올가미에 예속당할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주부들과 남자들이 모두 가사노동과 자급적 공동체 노동에 충실해 버리면 아무리 잘난 사람들도 제 아이는 제가 기르고, 제 식구 먹을 농사는 제가 짓고, 제 가족 빨래는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완전 평등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농촌 노인들의 삶처럼 자급적 소비만이 고용도 피고용도 없는 최고의 윤리적 소비라는 것입니다.

 

천규석 올림

 

   

 

천규석

옹골진 농사꾼이다. 때로는 급진적인 근본주의자로, 때로는 철학자로, 때로는 극단적인 환경론자로 비치지만, 자신에게는 무섭도록 철저한 생활인이다. 1938년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술대학과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후 1965년 이농의 물결을 뒤로한 채 농촌공동체 건설의 꿈을 품고 귀향하여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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